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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문제의 몇가지 측면

Antonio Gramsci, "Some Aspects of the Southern Question", in R. Bellamy (ed.), Pre-Prison Writing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이 글은 또한 Quintin Hoare가 편집한 Antonio Grmasci, Selectons from Political Writings 1921-1926, Lawrence and Wishart, 1978을 대본으로 참고했으며, 여기에 실리는 역주는 대부분 Lawrence and Wishart판을 따른 것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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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남부문제]로 알려진 이 문헌은 1926년 그람시가 체포될 당시 작업중이던 초고이며 따라서 미완으로 남아있다. 그는 이 글을 포함하는 일련의 시리즈를 출판할 예정이었다. 이 글은 흔히 그람시가 발전한 서구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혁명전략(진지전!)을 제공한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후진적 지역의 특수한 맥락에 기반한 사고를 하고 있었음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이탈리아의 남부가 그러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 글은 그가 이후 {옥중수고}에서 발전시키게 되는 여러 아이디어의 단초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어떤 점에서는 오히려 {옥중수고}가 이 '남부문제' 수고에 대한 방대한 후주로 읽혀져야 할지도 모른다. 역사적 블럭과 헤게모니의 문제, 지식인의 역할, 국민적-민중적(national-popular) 정치의 중요성 등에 대한 사고가 이전 평의회 운동과 이탈리아 공산당(PCI)의 경험을 기반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최근 황태연 교수는 {지역패권의 나라}(개마고원) 등의 글에서 그람시의 이 문헌을 근거로 '호남당을 중심으로한 저항적 지역연합'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곡학아세를 보여주고 있다. 모든 사례들을 김대중 지지를 향해 끼워맞추고 있는 세세한 논거들의 결함은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그람시의 맥락을 완전히 왜곡하고 있는 몇가지는 지적되어야 겠다. 우선, 그가 '한국의 살베미니'라고 칭하고 있는 김대중은 살베미니라기 보다는 남부출신의 자유주의 수상 살란드라 혹은 니티와 흡사한 인물일 것이다. 살베미니가 추방당한 이후 미국에서 역사학자로서 토리노의 공장점거를 열렬히 변호하는 저작을 저술한 것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둘째, 그람시가 의도한 것은 남부의 대다수 '전통적 지식인'들과 고베티와 같은 새로운 민주적 지식인의 층위를 구분하고 이들을 노동자계급의 편으로 견인하는 것이었다. 황태연은 재야 노동운동의 독자후보파, 민중당, 이번 대선의 노동자후보를 이탈리아 북부의 꽉막힌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집단자살'과 똑같다며 질타하지만, 그는 호남 내부의 진보적이고 저항적인 세력의 형성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김대중이 호남 민중보다는 호남 자본가들과(그리고 앞으로는 영남 자본가들과 더욱) 결탁하든 말든, 결국 영남 노동자들이 김대중에게 표를 던지는 일만 남는 것이다. 그러나 그람시는 사사리여단과 참전용사 운동, 남부 지식인들 사이에서의 동요(남부주의를 탈각하는 움직임)와 같은 것에 주목할 것을 끊임없이 촉구하고 있다. 셋째, 그람시적인 계급-지역 동맹전략은 여러 면에서 영호남 보다는 (황태연도 잠시 언급하고 있는) 통일을 전후로한 남한 노동자계급과 북한 인민 간의 동맹에 훨씬 적실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진지하게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보수반동적 블럭을 파괴하도록 하는 것 이전에 그럴 수 있도록 PSI나 PCI와 같은 정치세력의 형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큰 왜곡들에 비하면 '대중성과 현대성을 살리기 위해서'라며, 이탈리아 공산당을 '진보정당'으로, 민중권력을 '대권'으로, 그리고 '계급-지역 동맹'을 '지역-계급 동맹'으로 대체하는 것과 같은 의도적 오류는 차라리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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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트를 쓰게 된 것은 Il quarto stato 12월 18일자에 'Ulenspiegel'<주1>이라는 이름으로, 저널 편집자의 다소 우스꽝스러운 해설의 서문과 함께 실린 남부문제에 대한 기사 때문이다. 그의 글에서 'Ulenspiegel'은 Guido Dorso의 근작(La rivoluzione meridionale, Piero Gobetti 출판, Turin, 1925)을 소개하면서 남부문제에 관한 우리 당의 입장에 대한 Dorso의 논평을 언급하고 있다. 그들의 표현들에 따르면, Il quarto stato의 편집자들--자신들을 '총괄적인 범위에 걸쳐 남부문제에 아주 정통해 있는 젊은이들'[sic]이라고 주장하는--은 공산당이 어떤 '점수'를 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집단적 반대를 표하고 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Quarto stato지의 젊은이들은 이제까지 참을성 많은 신문들에 대하여 훨씬 가혹한 의견과 반대도 피력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이들 '젊은이들'은 이렇게까지 말한다(그리고 나는 인용한다), "우리는 토리노 공산주의자들의 요술공식을 잊지 않고 있다. 대토지를 농촌 프롤레타리아에게 분배하는 것. 이 공식은 남부문제에 대하여 지각있는, 현실적인 시각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바로 잡아두어야만 하겠는데, 왜냐하면 여기서 '요술'적인 것은 오직 Il quarto stato에 기고하는 '젊은이들'의 무책임성과 얄팍한 딜레탕티즘일 뿐이기 때문이다.

'요술공식'은 전적으로 꾸며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몰염치한 뻔뻔스러움으로 진실을 왜곡하려 한다면, 이는 Il quarto stato의 '룬은이들'이 그들의 아주 명민한 독자들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실제로 토리노 공산주의자들의 관점이 요약된 <신질서; L'Ordine Nuovo>(1920년 1월, 제 3호)의 일부를 여기 전재한다.

북부 부르조아지는 이탈리아 남부와 도서를 종속시키고 이들을 착취당하는 식민지의 지위로 격하시켰다. 자본주의의 노예상태에서 자신을 해방하고 있는 북부 프롤레타리아트는 북부의 은행과 기생적 산업주의에 노예화되어있는 남부 농민 대중을 해방시킬 것이다. 농민들의 경제적 정치적 재생은 미경작지나 황무지의 분배에서가 아니라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와의 연대 속에서 찾아져야만 한다. 역으로 프롤레타리아트는 농민의 연대에 의존하며 자본주의가 토지 자산으로부터 부활하지 않고 남부 이탈리아와 도서가 자본주의적 반혁명의 군사적 기반이 되지 않을 것을 명확히 하려는 '이해'를 갖는다. 공업에 노동자 통제를 도입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업을 농민을 위한 농기계, 농민을 위한 의복과 신발, 농민을 위한 전력의 생산으로 정향시키게 될 것이며, 공업과 은행이 농민에 대한 더 이상의 착취를 수행할 수 없도록, 농민들을 그들 금고의 노예로 묶어둘 수 없도록 만들 것이다. 공장 전제주의와 억압기구를 분쇄함으로써, 자본가들을 유용노동의 법칙에 굴복케 할 노동자국가를 건설함으로써, 노동자들은 가난과 절망의 모든 굴레의 사슬을 부수게 될 것이다. 노동자독재를 수립하고 공업과 은행을 접수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농민들의 지주들에 대항한, 폭풍우와 가난에 대항한 투쟁에서 국가 관료기구의 육중한 추를 움직여 그들을 뒷받침하게 될 것이다. 농민들에게 신용대부를 제공하고,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약탈에 대한 생명재산보험을 갖추게 될 것이다. 개간과 관개의 공공사업을 수행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농업생산을 증대시키고 농민대중의 연대를 획득하고 유지한다는 명목의 이유로 수행될 것이다. 도시와 시골 간의, 북부와 남부간의 평화와 우애라는 유용한 목적으로 공업생산을 정향시킨다는 이해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상은 1920년 1월에 씌여진 것이다. 7년이 흘렀고 우리 역시 정치적으로 7년의 나이를 먹었다. 여기에는 오늘날이라면 더 잘 표현될 수 있을 개념들도 포함되어 있다. 산업에 대한 단순한 노동자들의 통제로 특징지워지는 국가권력의 장악 직후와 그 이후 시기 간에는 더 뚜렷한 구별이 가능하고 또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토리노 공산주의자들의 기본 개념은 대토지를 분배하는 '요술공식'이라기 보다는 부르조아지를 국가권력에서 몰아내기 위한 북부 노동자와 남부 농민들간의 정치적 동맹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대토지의 기계적 분배를 하나의 '요술 해법'으로 생각하는 환상을 경고한 것은 다름아닌 토리노 공산주의자들이었다(물론 그들이 두 계급간의 연대행동의 부수적 조치로서 토지 분배를 지지하기는 했지만). 1월 3일의 같은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피폐한 농민이 미경작지 또는 황폐한 토지를 점유하는 것이 어떤 이득을 가질까? 기계도 없이, 작업 숙소도 없이, 그를 추수기까지 버티게 할 신용대부도 없이, (만약 그가 먼저 그의 황무지의 튼튼한 관목이나 적어도 말라빠진 무화과나무에 목매기 전에 가까스로 추수시기 까지 갔다 하더라도) 그로부터 수확물을 구매하고 고리대금업자의 마수로부터 그를 지켜줄 조합기구도 없이--이 모든게 하나도 없다면 한 농민이 토지를 점유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농민에게 토지를 준다는 가장 실제적이고 결코 '요술'적이지 않은 공식을 지지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분배가 두 동맹계급 부분의 전체적인 혁명적 행동의 맥락 속에서, 공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 아래서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Quarto stato의 기고자들은 그들이 토리노 공산주의자의 것으로 몰아붙인 '요술공식'을 허공으로부터 만들어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이 보여준 저널리즘적 진지함의 결여와 가책의 결핍은 시골 구멍가게 철학자에게나 어울릴만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것들은 일정한 중요성과 영향력을 갖는 정치적 요소이기도 하다.

프롤레티라아 진영 내에서, 토리노 공산주의자들은 부인할 수 없는 '점수'를 획득했다. 즉, 남부문제를 노동자계급 전위의 관심영역으로 끌어들였고 이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국민적 정책의 핵심문제의 하나로 제시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남부문제를 모호한 지식인적 국면--소위 '구체주의'의 국면<주2>--으로부터 새로운 국면으로 이동시키는 데 실제적인 역할을 했다. 토리노와 밀라노의 혁명적 노동자들은 남부문제의 주역이 되었고, (Quarto stato의 '젊은이들'의 정신적 지도자들의 이름만 들더라도) 주스티노 포르투타토, 가네타도 살베미니, 유제니오 아치몬티, 그리고 아르투로 라브리올라와 같은 인물들을 대체하게 되었다.

토리노 공산주의자들은 구체적인 용어로 '프롤레타리아트 헤게모니'의 문제를, 말하자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사회적 기반과 노동자국가의 문제를 제기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하는, 지배적인 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노동인구 다수를 자본주의와 부르조아 국가에 대항하여 동원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탈리아에서, 여기에 현존하는 실제 계급관계 내에서, 이는 광범한 농민 대중들의 동의를 얻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농민문제는 역사적으로 결정된 것이어서, 그것은 '농민과 농업문제 일반'과는 다르다.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 전통의 특수한 성격과 이탈리아 역사의 특수한 경로의 결과로, 농민문제는 두가지 특징적이고 특정한 형식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은 남부문제와 바티칸 문제이다. 결국,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 대중 다수를 획득한다는 것은, 이러한 두가지 문제를 수용하여 사회적 관점에서 그들이 대변하는 계급을 이해하고, 이러한 요구를 자신의 혁명적 이행 프로그램에 흡수하며, 이들을 투쟁의 목표들 가운데 배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토리노 공산주의자들이 해결해야 했던 최초의 문제는 전반적인 국가생활 구조 내에 존재하며, 부르조아 교육, 부르조아 언론, 부르조아 전통의 세례에 무의식적으로 종속되어있는 하나의 국민적 요소로서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일반적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개조해낼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부르조아 선전가들에 의해 북부의 대중 사이에 방대한 규모로 퍼뜨려지는 이데올로기가 어떠한 것인가는 잘 알려져있다. 남부는 이탈리아의 사회적 발전을 저지하는 거추장스러운 족쇄라는 것. 남부인들은 생물학적으로 열등한 종이며, 본성상 반(半)야만인이거나 야만인과 다름 없다는 것. 만약 남부가 후진적이라면 그 잘못은 자본주의 체제나 어떤 다른 역사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남부인들을 게으르고 어리석고 사악하고 야만적이게 만든 본성 때문이라는 것--몇몇의 위대한 천재들의 순전히 개인적인 파열이 이러한 잔인한 운명을 완화하는 유일한 것이지만, 이들은 메마른 불모의 사막에 고독하게 서있는 야자나무와 같다는 것. 사회당은 북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이러한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의 견인차 역할을 상당한 정도로 수행했다. 사회당은 소위 실증주의 학파를 구성하는 문필가 일당--Ferri, Sergi, Niceforo, Orano 및 이들의 소 추종자들 같은 사람들이며, 이들은 기사, 촌극, 단편소설, 장편소설, 인상기, 회상기 할 것 없이 똑같은 후렴구를 다른 형식으로 반복한다--의 모든 '남부주의' 문학에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과학'은 영락하고 착취당하는 이들을 깔아뭉개는 데 사용되었는데, 이번에는 사회주의로 회칠하고 프롤레타리아 과학이라고 자기주장하는 과학이었던 것이다.

토리노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열성적으로 저항했다. 특히 토리노는 남부와 도서의 '도적질'에 대한 참전 재향군인들의 설명과 묘사가 대중적 전통과 대중 정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곳이었다. [이러한 영향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은 열성적으로 저항하고 정치적 행동을 취했으며, 역사적으로 큰 중요성을 갖는 결과를 얻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특히 토리노에서, 남부문제의 해결책임을 증명하게될 맹아를 창출해냈던 것이다.

사실상 전전(戰前)에도 토리노에서는 전후 시기에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발전될 모든 행동과 선전을 이미 잠재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1914년, Pilade Gay의 사망으로 시의 제 4선거구가 비게 되어 누가 새 후보가 되어야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미래의 <신질서>의 편집자들을 포함하는 사회주의 분파의 한 집단으로부터 가에타노 살베미니를 후보로 지명하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살베미니는 당시에 남부 농민대중들의 가장 급진적인 대변인이었다. 그는 사회당 바깥에 있었고, 실제로 사회당에 반대하는 대단히 열정적인 켐페인을 이끌고 있었다--이는 물론 대단히 위험스러운 것이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그의 주장과 비난들은 남부 노동대중 사이에서, 투라티, 트레베스, 다라고나와 같은 인물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공업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919, 20, 21, 22년에 친위대가 노동자들에게 발사했던 많은 탄환의 납은 살베미니의 기사를 인쇄하는 활자에 쓰이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토리노의 그룹은 그들의 입장을 세우는 데 살베미니의 이름을 이용하고자 했으며, 이는 [후보]지명에 대한 그의 동의를 얻기 위해 피렌체로 갔던 Ottavio Pastore 동지가 살베미니 자신에게 확인한 바였다. "토리노의 노동자들은 아풀리아의 농민들을 위한 의원을 선출하고 싶어한다. 토리노 노동자들은 1913년의 총선에서 Molfetta와 Botonto 농민의 압도적 다수가 살베미니를 지지했으나 지올리티 정부의 행정적 압력과 청부폭력배 및 경찰이 아풀리아 농민들이 그들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토리노의 노동자들은 살베미니에게 어떠한 종류의 충성도 요구하지 않는다. 당에 대해서도, 강령에 대해서도, 사회주의자 의회 그룹에 대해서도. 일단 그가 선출되면, 살베미니는 토리노의 노동자들이 아닌 아풀리아의 농민들을 책임지게 될 것이다. 토리노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원칙에 따라 선거운동을 전개할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도 살베미니의 정치활동을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살베미니는 지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결정했지만, 그는 제안에 동요했고, 감명받기까지 했다(당시에 공산주의적 '배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고 우리는 서로 정중하고 우호적으로 행동했다. 그는 무솔리니를 후보로 제안했고 선거투쟁에서 사회당을 지원하기 위하여 토리노에 올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노동회의소와 Statuto 광장에서 두 차례 대규모 유세를 가졌는데, 여기 모인 대중들은 그에게서 북부 프롤레타리아트 보다 훨씬 더한 지긋지긋하고 흉포하게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남부 노동자들의 대표자를 발견하고는 갈채를 보냈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잠재적으로 보여진, 그리고 당시에는 순전히 살베미니의 결정 때문에 더 이상의 결과를 낳을 수 없었던 이 접근은 전후 시기에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재개되고 유의미한 결과를 낳게 된다. 가장 두드러지면서도 상징적인 사건들을 상기해보자.

1919년, 이후 사르디니아 행동당(Sardinian Action Party)이 될 첫 전조로서 '청년 사르디니아(Young Sardinia)' 연합이 창설되었다. '청년 사르디니아'는, 섬과 본토의 모든 사르디니아인들을, 정부가 전쟁 기간 중에 군인들에게 행한 약속을 이행하도록 효과적인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지역 블럭으로 단결시키려 했다. 본토쪽의 '청년 사르디니아'의 조직가는 Pietro Nurra 교수라는 사회주의자였는데, 그는 아마도 매주 Quarto stato의 지면에서 새로운 지평을 발견하는 지금의 '젊은이들' 그룹의 일원일 것이 분명하다. 변호사, 교사, 공무원들이 훈장, 직함, 메달을 낚을 모든 새로운 기회를 찾아 열광적으로 운동에 모여들었다. 피에드몽에 거주하는 사르디니아인들을 위하여 토리노에서 개최된 선거구민 회합은 참석한 이들의 엄청난 숫자가 인상적이었다. 다수는 특별한 자격증이 없는 이들, 미숙련 공장노동자들, 어렵게 사는 연금생활자들, 현재는 온갖 소규모 사업에 참가하고 있는 전직 헌병, 간수, 하급 공무원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모두들 시골의 동료들 사이로 돌아가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고, 가족과 친구의, 기억들의, 고난과 희망--그들의 고향으로, 그러나 보다 번영하고 부유한 고향으로 돌아가서 비록 소박하더라도 삶을 꾸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무한한 유대로 그들을 여전히 묶고 있는 자신들의 고향에 관한 연설을 듣고 열광했다.

정확히 8명의 사르디니아인 공산주의자들은 이 회합에 참석해서 의장에게 그들의 결의를 전달하고 반대연설의 기회를 요청했다. 온갖 점잔으로 윤색하고 지방적 수사로 꾸며진 공식 발언자의 고무적이고 웅변적인 연설에 뒤이어서, 참석자들이 과거의 슬픔들과 사르디니아 연대가 전투에서 뿌린 피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고 모두들 사르디니아의 마음씨 착한 자식들에 의해 구성된 단일한 블럭이라는 생각에 격정적으로 사로잡히고 난 후에, 곧바로 반대 행동을 '감행'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가장 낙관적인 예상은, 만약 실제 린치를 당하지 않는다면, '군중의 고귀한 분노'에서 구출되어 최소한 경찰서에 잠시 신세를 지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연설에 대한] 응답은, 그것이 엄청난 놀람을 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깊은 경청이었으며, 일단 말문이 빠르게 그러나 논리정연하게 터지기 시작하자 혁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딜레마 --"가련한 당신들은 진정으로 사르디니아 귀족들과, 당신을 파멸시켰고 자본가들의 착취의 지방 감독관이었던 저들과 블럭을 구성하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본토의 혁명적 노동자들과, 모든 형태의 착취를 폐절하고 모든 피억압자들을 해방하고자 하는 이들과 블럭을 구성하기를 원합니까?"--이 딜레마가 참석했던 이들의 가슴을 파고 들었던 것이다. 투표는 회합를 양분했으며, 그것은 엄청난 성공이었다. 한편에는 휘황하게 차려입은 신사들, 중절모를 쓴 공무원들, 전문가들의 작은 집단이 분노와 공포로 얼굴이 흙빛이 된 채 40여명의 경찰을 동의의 장식물로 달고 모였고, 다른 한편에는 비참한 이들이, 소박하게 단장한 아낙네들과 함께 조그만 공산주의자 세포를 둘러싸고 모여들었다. 한 시간 뒤 노동회의소에서 사르디니아 사회주의 교육클럽이 256명의 성원으로 창설되었다. '청년 사르디니아'의 구성은 무기한 연기되었고, 결코 성사되지 않았다.

이는 사사리 여단(Sassari Brigade), 즉, 거의 사르디니아인들로만 구성된 여단의 병사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행동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사사리 여단은 1917년 8월의 토리노에서 일어난 봉기운동의 진압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분명 결코 노동자들과는 가까워질 수 없다고 믿어졌었다. 왜냐하면 군중들에게는 억압 행위가 남겨놓은 증오의 기억--그들이 단지 억압의 물질적 도구일 뿐이었다 하더라도--이, 그리고 [병사들의] 대오 사이에는 폭도들의 주먹에 깔렸던 기억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여단은 신사 숙녀의 대열로부터 꽃과 담배, 과일로 환영받았다. 군인들의 심리상태는, 초기 선전활동에 참가했던 사사리 출신의 피혁노동자가 전하는 다음의 일화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나는 X 광장의 숙영지(처음 며칠동안 사르디니아 군인들은 마치 점령도시에서처럼 광장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로 다가가서 한 젊은 농민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그와 같은 사사리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는 나에 따뜻하게 인사했다.

"토리노에는 무엇을 하러 왔나요?"

"우리는 파업을 하고 있는 신사들에게 한방 먹이러 왔지요."

"하지만 파업을 하고 있는 것은 신사들이 아니에요. 그건 노동자들--가난한 사람들이지요."

"여기서 그들은 모두 신사들이에요. 그들은 칼라 붙은 옷에 타이를 매고 하루에 30리라를 번다구요. 누가 가난한 사람들인지 나에게 얘기할 필요는 없어요--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이 어떻게 차려입고 다니는지도 압니다. 그래요, 사사리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지요. 우리 '농투성이'들은 모두 가난하고 하루에 1 1/2리라를 법니다."

"그렇지만 나는 노동자이고 가난합니다."

"그건 당신이 사르디니아인이기 때문에 그럴 뿐이지요."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파업을 벌인다면, 댁은 나에게 총을 쏠 건가요?"

병사는 잠시 생각하고는 그의 손을 내 어깨에 얹고 말했다, "이봐요, 당신이 다른 이들과 파업을 벌일 때는, 당신은 그냥 집에 있으라구요."

이것이 노동자들은 아주 소수만이--Iglesias 평원에서 온 광부들--포함되어 있던, 여단의 대다수의 태도였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난후 7월 20-21일의 총파업 전야에 여단은 토리노를 나오게 되었으며, 나이든 병사들은 해고되고 부대는 세 개로 나뉘어 1/3은 Aosta로, 1/3은 Trieste로, 1/3은 로마로 보내지게 되었다. 여단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야간에 이동해 떠나갔다. [이 때는] 역전에서 그들을 환호하는 품위있는 군중도, 노래도 없었다. 그들이 부르는 군가조차, 그들이 도착했을 때 불렀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사건들이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했는가? 오히려, 이 사건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느껴지고 있고 인민 대중들의 가슴과 마음 속에 계속 작용하게 되었다. 일례로 이들은 결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두뇌를 각성시켰고 이 경험은 흔적으로 각인되었고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우리의 문서자료들은 흩어졌고 우리 스스로가 검거와 박해를 피하기 위해 많은 서류를 파기했지만, 그러나 우리는 사르디니아로부터 <전진; Avanti!> 편집국에 배달된 수천통의 편지를 기억하고 있다. 이 편지들은 종종 집단 명의로, 사르디니아의 특정 마을의 사사리 여단 퇴역군인의 전원서명으로 되어 있었다. 우리가 지지했던 정치적 입장은 기록되지 않는--그리고 기록될 수 없는--길을 따라 증식되었다. 사르디니아 행동당의 구성은 기층단위의 수준에서 이에 의해 영향받은 것이며, 이러한 연관에서 풍부한 함의와 중요성을 갖는 에피소드들을 인용할 수 있겠다.

이러한 행동의 가장 최근의 특기할만한 반향은 1922년, 칼리아리 부대(legion)의 300명의 헌병대가 사사리 여단과 동일한 목적으로 토리노에 보내졌을 때 일어났다. <신질서> 편집국에서 우리는 이들 헌병대의 대다수가 서명한 성명서(statement of principle)를 받았다. 이 편지는 모든 점에서 남부문제에 대한 우리 자신의 입장 반영하고 있었다. 이는 우리의 접근이 옳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이러한 접근이 정치적으로 유효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가 이를 그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대중 스스로가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과 적용할 수단에 대하여 확신하지 못한다면 어떠한 대중행동도 불가능하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하나의 계급으로서 지도하고자 한다면 모든 조합주의적 자취와 생디칼리즘적 선입견과 껍데기를 벗어버려야 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농민과 도시 반프롤레타리아의 일정한 범주의 신뢰와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한 직종과 다른 직종 간에 존재하는 구별들이 극복되어야할 뿐만 아니라, 직종 특수주의가 사라진 후에조차 노동자계급 내에 지속되고 있는 특정한 선입견들을 극복하고 특정한 종류의 이기심을 정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금속공, 가구공, 건축공 등은 금속공, 가구공, 건축공으로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들로서 생각하기 시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 그들은 농민과 지식인들을 지도하고자 하는 계급, 이들 다른 사회 층위들의 다수가 조력하고 따를 때 비로소 사회주의를 획득하고 건설할 수 있을 뿐인 하나의 계급의 성원인 노동자들로서 생각해야만 한다. 이것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도계급이 되지 못할 것이며 이들 층위(이탈리아에서는 인구의 다수를 대표하는)는 부르조아의 통제 아래에 남아서 국가가 프롤레타리아 공격에 저항하고 이를 소진시킬 수 있게 할 것이다.

자, 남부 문제의 영역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프롤레티라아트가 이러한 견지에서 자신의 임무를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가지 사건이 인용되어야겠는데, 하나는 토리노에서, 다른 하나는 레기오 에밀리아(Reggio Emilia)에서--말하자면, 개량주의와 계급 조합주의의 거점, '남부주의자'들이 남부 농민들 사이의 선전에서 언제나 인용하는 일종의 노동자계급 보호주의의 거점에서--일어난 일이다.

공장점거 이후에 피아트의 경영주는 노동자들에게 하나의 조합으로 회사 운영을 맡을 것을 제안했다. 너무도 당연하게 개량주의자들은 이 제안에 찬동했다. 산업 위기가 희미하게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고 실업의 망령이 노동자계급의 가족을 괴롭히고 있었다. 피아트가 하나의 조합이 된다면, 숙련노동자들과 특히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노동자들 대부분에게는 일정한 수준의 직무안정성이 보장될 것이며, 그들은 해고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던 사회당 분파는 이 논쟁에 정열적으로 개입했다.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이야기했다.

- 만약 노동자들이 지금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는 부르주아 정치세력의 체계로 편입되기로 결정한다면, 피아트와 같은 대규모 기업은 노동자들의 조합으로서만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피아트 경영주의 제안은 전적으로 지올리티 정치 계획의 일부이다. 이 계획이란 무엇인가? 부르조아지는, 전전에도, 더 이상 평화적으로 지배할 수 없었다. 1894년의 시칠리아 농민의 반란과 1894년의 밀라노 봉기는 이탈리아 부르조아지의 급소의 실험대(experimentum crucis)였다. 1890-1900년의 피의 십년이 지나자 부르조아지는 지나치게 배제적이고, 폭력적이며 직접적인 독재를 포기해야만 했다. 남부의 농민과 북부의 노동자들은, 비록 조화로운 방식은 아니었지만, 동시에 이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 세기가 바뀌면서 지배계급은 계급동맹, 계급적 정치 블럭이라는--말하자면 부르조아 민주주의라는--새로운 정책을 도입했다. 그들은 선택해야만 했다. 남부 농민들과의 동맹, 자유무역, 보통선거권, 행정적 탈집중화와 공산품의 가격인하를 의미하는 농촌 민주주의든이지, 아니면 보통선거권의 불인정, 관세 장벽, 고도로 집중화된 국가의 유지, 임금과 노조의 자유에 대한 개량주의적 정책을 의미하는 자본가-노동자 공업블럭이든지 간에. 그들은 후자의 해결책을--우연만은 아니게--선택했다. 지올리티는 부르조아 지배를 인격화했고 사회당은 지올리티 정책의 도구가 되었다.

- 자세히 살펴보면, 사회주의운동과 노동자운동에서 가장 근본적인 위기들이 발생한 것은 대중들이 그들의 개량주의 지도자들로부터 자생적으로 이반하게 된 1900년에서 1910년 까지의 10년간이었다. 생디칼리즘이 생겨났으며, 이는 노동자들이 부르조아지와의 블럭에 반대하면서 농민들과의, 무엇보다 먼저 남부의 농민들과의 블럭을 지지하는 저항의 본능적이고, 기초적인--원시적이지만, 그러나 건강한--표현이었다. 확실히 생디칼리즘은, 실제로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선진적 지식인들로 대표되는 남부 농민 부분이 프롤레타리아를 지도하려는 약한 시도이다. 이탈리아 생디칼리즘의 지도적 중핵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적 핵심은 무엇인가? 생디칼리즘의 지도적 중핵은 거의 모두가 남부인들이다. Labriola, Leone, Longobardi, Oranco를 생각해보라. 생디칼리즘의 이데올로기적 핵심은 전통적인 종류들보다 더 열정적이고, 더 공격적이며, 더 호전적인 새로운 종류의 자유주의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생디칼리즘의 모든 연속적인 위기와 생디칼리즘 지도자들의 부르조아 진영으로의 점진적 월경에는 두가지 기본적 문제가 깔려있는데, 그것은 이민과 자유무역으로 모두 남부주의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민 현상은 Enrico Corradini의 '프롤레타리아 국가'라는 사상을 일으켰다. 전체 지식인 층위에게 리비아전쟁은 자본주의와 금권정치 세계에 대한 '위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공격의 시작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주3> 생디칼리스트 그룹 전체가 민족주의로 넘어가게 되었다--실제로, 민족주의당(Nationalist Party)은 이전의 생디칼리즘으로부터 분기해나온(ex-syndicalist) 지식인들(Monicelli, Forges- Davanzati, Maraviglia)에 의해 창건되었다. 라블리올라의 History of a Decade(1900년부터 1910년까지의 십년)는 이러한 반-지올리티적이고 남부주의적인 신자유주의의 가장 전형적이고 특징적인 표현이다.

- 이 문제의 10년 동안 자본주의는 강화되고 발전했으며 그 활동의 일부는 포 계곡의 농업을 향하고 있다. 이 10년간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포 계곡 농업 노동자들의 대중파업이었다. 북부 농민들 사이에서는 심대한 격변이 발생했다. 계급 분화가 구석구석까지 진행되었으며(1911년의 센서스 수치에 따르면, braccianti[일용노동자]의 수는 50퍼센트까지 증가했다) 이에 조응하는 정치적 조류들과 정서적 태도가 생겨났다. 기독교 민주주의와 무솔로니주의는 이 시기의 가장 두드러진 두 산물이었다. 로마냐는 이들 두가지 새로운 움직임의 지방적 용해로였으며, bracciante가 정치투쟁의 사회적 주역이 된 듯 했다. 사민주의의 좌익 기관(Cesena의 L'Azione와 같은)과 무솔리니주의는 금방 '남부주의'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Cesena의 Azione는 가에타노 살베미니의 <통일; L'Unità>의 지역판이었다. 무솔리니의 편집권 하에 있던 <전진>은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생디칼리스트와 남부주의 필자들의 연단으로 변화해나갔다. Fancello, Lanzillo, Panunzio와 같은 이들이 단골 기고자가 되었다. 살베미니 자신은, 심지어 프레졸리니의 <소리; La Voce>의 연인(darling)이 되기까지 한 무솔리니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았다. 실제로 무솔리니가 생디칼리스트와 남부주의자 일단에 둘러싸여 <전진>과 사회당을 떠나던 모습을 모두들 기억한다.

- 이 시기에 혁명 진영에서의 가장 주목할만한 반향은 1914년 6월의 피의 주간(Red Week)<주4>이었으며, 진앙은 로마냐와 마르셰였다. 부르조아 정치활동의 영역에서 가장 두드러진 반향은 젠틸로니 협정<주5>이었다. 포 계곡의 소농운동의 결과로 사회당은 1910년 이후 비타협 전술로 복귀했기 때문에, 지올리티가 지지하고 대표하는 공업 블럭은 그 유효성을 상실했다. 결국 지올리티는 총을 다른 편 어깨로 옮겼다. 그는 부르조아지와 노동자의 동맹을 부르조아지와 카톨릭 간의 동맹으로 대체했다. 당시 카톨릭은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의 농민대중을 대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동맹으로 인해, 손니노의 보수당은 남부 이탈리아에 안토니오 살란드라 주변의 작은 세포만을 남긴 채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 전쟁기간과 전후의 시기에 부르조아 계급 내에서는 일련의 무척 중요한 미세한 과정이 일어났다. 살란드라와 니티 두 사람은 최초의 (물론, 19세기 전체에서 부르조아 독재의 가장 정력적인 대표자였던 크리스피와 같은 시칠리아인을 제외하면) 남부인 정부 수반이었다. 그들은 공업 부르조아지-남부 지주 계획을 실현하고자 시도했다--살란드라는 보수적 기반에서 그리고 니티는 민주적 기반에서(이들 정부 수반은 모두 Corriere della Sera<주6>로부터, 말하자면 롬바르디아의 섬유산업으로부터 실질적 도움을 받고 있었다). 살란드라는 이미 전쟁 기간 중에 국가조직의 기술적 세력을 남부인들로--말하자면, 지올리티의 정부인원을 새로운 부르조아 정치경력을 갖고 있는 새로운 인원들로 대체하려고 시도했었다. 특히 1917-18년에 La Stampa가 주도한, 지올리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국가의 '아풀리아화(Apulianization)'를 막기 위하여 전개한 켐패인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켐페인은 La Stampa에서 Francesco Ciccotti에 의해 지도되었다--환언하면, 사실상 이는 지올리티와 개량주의자들 간의 의견일치의 표현이었다. 이 문제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었으며 지올리티주의자들은, 그들의 격렬한 방어적 완고함에 있어서, 상층 부르조아의 정당에 허용된 한도를 넘어설 정도였다. 그들은 우리의 기억에도 생생한 반(反)애국주의와 패배주의를 보여주기에 이르렀다.

- 오늘날, 지올리티는 다시 한번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대중운동의 추동에 겁먹은 상층 부르조아지는 다시 한번 자신들을 그의 손에 의탁하고 있다. 지올리티는 토리노의 노동자들을 길들이고 싶어한다. 그는 이들을 두차례, 지난 4월의 파업과 공장 점거때 노동총연맹의--결국, 조합주의적 개량주의자들의 도움으로 분쇄했었다. 그는 이제 노동자들을 부르조아 국가의 체계로 포섭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실제로, 만약 피아트의 숙련 노동세력이 경영주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지금의 산업적 지분은 채무(debenture)가 될 것이다. 말하자면, 조합은 사업 상태가 어떠하든 간에 채무자들의 고정된 분담금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피아트사는 노동자들을 마음대로 주무르고자 하는 부르조아지의 손아귀에 남아있는 신용제도에 의해 모든 수혈을 차단당하게 될 것이다. 노동세력은 노동자계급 의원들의 활동을 통해--노동자계급 정치정당을 정부 정책으로 종속시키는 것을 통해-- '노동자계급을 도우러 올' 국가에 자신을 속박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지올리티의 계획이 가져올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토리노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더 이상 독립적 계급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부르조아 국가의 부속품이 될 뿐일 것이다. 계급 조합주의는 승리를 거두겠지만,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도자와 안내자로서의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상실할 것이다. 더 빈곤한 노동자 대중들은 이를 특권으로 바라볼 것이며, 농민 대중들을 부르조아와 같은 수준에 있는 착취자로 인식할 것이다. 왜냐하면 부르조아지는--그들이 언제나 그래왔듯이--농민 대중에게 그들의 고통들과 그들의 비참한 빈곤의 유일한 원인으로서 노동자계급의 특권적 중핵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피아트의 숙련 노동세력은 우리의 관점을 거의 만장일치로 수용했고 경영주의 제안은 거부되었다. 그러나 이 경험은 그 자체로는 충분치 않았다. 행동의 과정 전체에서 토리노 프롤레타리아트는 상당한 수준의 성숙성과 정치적 능력에 도달했음을 스스로에게 보여주었다. 1919년에 공장에서 기술직과 감독직급 및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그들이 노동자들에 의해 지지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의 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상위 직급의 전투성을 분쇄하기 위하여, 경영인들은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선거를 통하여 직접 새로운 작업조(squad)와 직장(職長)을 지명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제안했다. 노동자들은, 사장을 위해 항상 억압과 박해의 도구로 행동해왔던 감독 직급들과 투쟁할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나 신문들은 때로는 한달에 7,000리라까지 달하는 이들의 매우 높은 봉급을 부각시키면서, 이들 직급들을 고립시키기 위한 맹렬한 켐페인을 전개했다. 숙련노동자들 역시, 그들 없이는 자신들의 요구를 획득할 수 없는 손노동자들의 선동에 지지를 보냈다. 공장 내에서, 모든 특권과, 보다 숙련된 범주에 의한 보다 덜 숙련된 이들의 착취의 모든 형태는 소멸되어버렸다. 이러한 행동들에 의하여 프롤레타리아 전위는 전위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획득했다. 이것이 토리노에서의 공산당 발전의 기반이었다. 그러나 토리노 밖에서는? 자, 우리는 의도적으로 토리노 밖의 사례를,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개량주의와 계급 조합주의가 가장 집중되어 존재하던 레기오 에밀리아를 언급하고자 한다.

레기오 에밀리아는 언제나 '남부주의자'들의 표적이 되어왔다. Camillo Prampolini의 구절, "이탈리아는 북부인과 더러운 남부인들로 나뉜다(L'Italia si divide in nordici e sudici)"<주7>라는 말은 북부의 노동자들에 대하여 남부인들 사이에 확산되어 있는 공격적인 증오의 가장 전형적인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레기오 에밀리아에서 피아트에서와 유사한 문제가 발생했다. 대회사는 조합 기업으로서 노동자들의 손에 양도되었다. 레기오의 개량주의자들은 이 계획에 대한 열광으로 부풀었고 그들의 신문과 집회에서 이를 칭송해 마지않았다. 한 토리노 공산주의자<주8>가 레기오로 가서 공장집회에서 발언권을 얻어 남부-북부의 문제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압도적 다수로 개량주의적, 조합주의적 입장을 거부했던 것이다. 개량주의자들은 레기오 노동자들의 진정한 정신을 대변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그들은 단지 이들의 수동성과 다른 소극적 측면들을 대변했을 뿐이다. 그들은 확실히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조직가와 선전가들의 대오에 고도로 집중한 덕분에 정치적 독점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러한 방식으로 혁명적 흐름이 발전되고 조직되는 것을 저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패퇴시키고, 레기오 노동자는 용맹한 투사이지 정부의 사료로 키워지는 되지떼가 아님을 드러내는 데는 한 명의 숙련된 혁명가로 충분했다.

1921년 4월이 되자, 5천명의 혁명적 노동자들이 피아트에서 해고되었고, 공장평의회는 폐지되었으며 실질임금이 삭감되었다. 필시 이와 유사한 일이 레기오 에밀리아에서 일어났다. 말하자면, 노동자들은 패배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희생이 헛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이 헛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동들의 직접적이고 전광석화같은 유효성을 증명할 일련의 대규모의 대중적 사건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농민의 경우에는, 그러한 증거는 항상,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어려우며, 남부의 농민대중에 관한 한 더욱 그렇다.

남부는 극도의 사회적 분열의 지역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인구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농민들은 그들 사이에서 아무런 응집력도 갖고 있지 않다(물론 아풀리아, 사르디니아, 시칠리아와 같은--남부의 넓은 그림의 구조 안에서 두드러진 특질들을 갖고 있는 지역에는 예외가 두어져야만 하겠다). 남부사회는 세 개의 사회적 층위로 구성된 거대한 농업 블럭이다. 그것은 각각, 무정형적이며 흩어져있는 거대한 영세농민 대중과, 농촌 부르조아지의 하위와 중간 층위의 지식인들, 그리고 대토지소유자와 주류 지식인들이다. 남부의 농민들은 항상적인 흥분상태에 있지만, 그러나 하나의 덩어리로서 그들은 그들의 열망과 요구를 통일적으로 표현할 능력이 없다. 중간층위의 지식인들은 농민 기만으로부터 그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활동의 동력(impulses)을 제공받는다. 대규모 대토지소유자들은 정치적 영역에서 주류 지식인들은 이데올로기적 영역에서 서로 유착하며, 최종적 수준에서, 이러한 현상의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결국 주스티노 포르투나토와 베네데토 크로체는 전체 남부 체계의 두 쐐기돌(keystone)을 대표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은 남부 반동의 두 주요 인물들이다.

남부의 지식인들은 이탈리아 국민 생활에서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사회적 층위 중 하나이다. 그 이유는 국가관료의 3/5 이상이 남부인들로 구성되어있다는 것만 생각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남부 지식인들의 독특한 정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몇가지 특별한 요소를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1. 모든 나라에서, 지식인의 층위는 자본주의의 발전에 의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왔다. 지식인의 예전의 모델은 주로 농민과 장인의 기반과 함께 한 사회에서 조직적 요소였다. 국가를 조직하고 상업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지배계급은 특정한 유형의 지식인을 생산해냈다. 공업은 기술적 조직가와 응용과학의 전문가라는, 지식인의 새로운 모델을 도입했다. 경제적 세력들이 국민생활의 대부분을 흡수할 정도로 자본주의적 방향으로 발전한 나라들에서 지배적이게 된 것은 주로, 질서와 지적 기율의 모든 특징을 갖는 지식인의 두 번째 모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농업이 주요한 또는 심지어 지배적인 역할을 계속하고 있는 나라들에서는 예전의 모델이 우세한 것으로 남아 있다. 그들은 국가 인사의 많은 부분을 충원하고 있고, 지방적으로도 마을과 지방 소도시에서 농민과 행정부 일반 사이에서 매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이러한 모델이 지배적이며 그것의 모든 전형적 특징들을 갖고 있다. 농민들 앞에서는 민주적이면서, 거대 대토지소유자와 정부 앞에서는 반동적이 되어, 정치적 음모와 부패와 불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계층의 특징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남부의 정치정당들의 전통적 배역(cast)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2. 남부 지식인들은 여전히 남부에서 매우 강력한 한 계급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농촌 부르조아지이다. 이들은 농민이 아니며, 땅을 경작하지 않는 소지주 혹은 대지주는 스스로 자신의 땅을 일구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면서도, 그들의 작은 땅에서 각각의 생계에 충분할만, 그의 아들을 대학이나 신학교에 보내고, 장교나 국가공무원에게 시집갈 딸에게 지참금을 줄 수 있을 정도를 추출--토지를 임대하거나 단지 수확의 일정몫을 나누어 받음으로써--하고자 한다. 이러한 계급적 배경으로부터 지식인들은 노동하는 농민들에 대한 맹렬한 혐오를 갖게 되며, 그들을 초과 노동인구 탓에 고혈을 짜는 노동 이후에 갈아치울 수 있는 노동기계로 간주하게 된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계급으로부터 농민과 그들의 파괴적 폭력에 대한 격세유전적이고 본능적인 맹목적 공포감을 이끌어내어, 이로부터 역으로 정련된 위선의 습관과 농민 대중을 속이고 누그러뜨리는 극도로 정련된 기술을 이끌어낸다.

3. 성직자는 지식인의 사회그룹에 속하기 때문에, 남부의 성직자가 전체적으로 북부 성직자와 다른 특질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부의 신부는 대체로 장인이나 농부의 아들이다. 그는 민주주의적 정서를 갖고 있고 보다 더 농민대중과 유착하고 있다. 도덕적으로 그는 종종 다소 공공연하게 여성과 동거하기도 하는 남부의 신부들보다 훨씬 고결하다. 그래서 그는 사회적으로 보다 깊숙한 정신적 직책을 행사하며, 가족의 전체 생활을 지도한다. 북부에서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와 교회 재산의 몰수가 남부보다 훨씬 급진적이며, 남부에서는 교구와 수도원이 막대한 고정자산이나 유동자산을 유지하거나 다시 비축하고 있다. 남부에서는 신부를 (1) 농민이 지대의 문제에서 다투게 되는 토지관리인(bailiff)로, (2) 턱없이 높은 이자율을 요구하면서 그의 지대와 이자의 수취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종교적 요소를 사용하는 고리대금업자로, (3) 모든 세속적 열정(여자와 돈)에 종속되어 있으며 따라서, 정신적 측면에서 사리분별이나 공평성의 신뢰를 주지않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결국 고해성사는 최소한의 지도 역할을 가질 뿐이며 농민들은, 종종 이교도적 미신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성직자에게는 거의 시간을 투여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인민당이 남부에서 (시칠리아의 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결코 지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제도와 대중 조직들의 네트워크를 가질 수 없었던 이유룰 설명해준다. 성직자에 대한 농민의 태도는 다음의 경구로 요약된다, "신부는 그가 제단에 있을 때 신부이지 다른 곳에서는 다른 이들과 똑같은 사람이다."

남부의 농민들은 지식인의 매개를 통해 대지주들과 연결된다. 농민운동은, 적어도 형식적 의미에서, 자율적이거나 독립적인 대중조직(즉 농민출신의 농민 기간요원을 선출하고 운동에서 발생하는 차이와 진전들을 반영할 수 있는 조직들)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항상 국가기구들의 평범한 단위들--지역 및 지방 평의회와 하원의회(Chamber of Deputies)--내에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지방 정당들의 구성과 해체를 통하여 일어나는데, 그 인원들은 지식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유력한 지주들과 그들의 대행인--살란드라, 오를란도, 디 체자로와 같은 이들--의 영향력 하에 있다.

전쟁은 이러한 조직 유형에 참전용사 운동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도입한 것처럼 보였는데, 여기서 농민-군인들과 장교-지식인들은 보다 통일적인 블럭을 구성하여 상당한 정도로 대지주들에 저항하고자 했다. 이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아멘돌라가 착상했던 국민연합(National Union)은 그 마지막 자취이며, 그 반파시즘 덕분으로 존재의 약간의 희미한 빛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남부에서 민주적 지식인들 부분에서의 뚜렷한 조직의 전통이 전혀 부재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집단과 같은 것들 조차도 응분의 관심과 주의가 기울여져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이는 전반적인 정치환경의 변화와 함께, 작은 물방울에서 범람하는 황토 격류로 발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참전용사운동이 보다 확실한 윤곽을 가지고 보다 견고한 자신의 사회구조를 창출하는 데 성공한 유일한 지역은 사르디니아였다. 그리고 이는 이해할만한 것인데, 그 이유는 특히 사르디니아에서는 대지주 계급은 매우 작았고, 아무런 기능이 없었으며 본토 남부의 매우 고대적인 문화적 정치적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데 있다. 농민대중들과 양치기들에 의해 아래로부터 행사되는 압력은 대지주의 사회적 상위계층의 압박으로 상쇄되지 않았고, 따라서 지배 지식인들은 그 힘의 압력을 느끼고는 국민연합보다 더욱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시칠리아의 상황은 사르디니아나 본토의 상황과 매우 다른 특질들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대지주들은 본토에서 보다 더욱 응집적이며 단호하다. 더욱이, 시칠리아에는 일정 정도의 공업과 고도로 발달한 상업이 존재한다(시칠리아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며 이탈리아 전체에서도 가장 부유한 곳에 속한다). 상위 계급들은 국민생활 내에서 그들의 중요성을 냉철하게 깨닫고 있으며 그들의 비중이 느껴지도록 활동하고 있다. 시칠리아와 피에드몽은 이탈리아 국가에 가장 많은 수의 정치지도자를 공급하는 두 지역이다. 이들은 1870년 이래로 지배적 역할을 가져온 두 지역이다. 시칠리아의 인민 대중들은 남부의 여타 지역에 비해 훨씬 앞서 있으나, 그들의 진보는 전형적으로 시칠리아적 형식을 띠고 있다. 시칠리아의 대중 사회주의는 그 자신의 전통과 발전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다. 1922년 의회에서는 도서에서 선출된 52명 중 약 20명이 이 곳 출신이었다.

우리는 남부의 농민들이 지식인의 매개를 통해서 거대 지주들과 연결된다고 이야기했다. 이러한 조직의 모델은 본토 남부와 시칠리아 전체에 걸쳐 가장 전반적인 것이다. 이는, 전체적으로, 북부 자본주의와 대 은행들의 매개자이자 감독관으로 봉사하는 거대한 소농 블럭을 만들어냈다. 그 유일한 목적은 현 상태(status quo)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 블럭 내에는 개선이나 진보를 향한 어떠한 계획이나 압박의 희미한 지적 기운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생각이나 계획이 제출되었다면, 이는 언제나 남부 바깥에서, 남부의 소농블럭의 보수주의자들과 의회에서 연합하고 있는 보수적 소농 정치그룹들(특히 투스카니의 것)에서 나온 것이다. 손니노와 프란체티는 남부문제를 국민적 문제로 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 계획을 작성한 극히 드문 지적인 부르조아 사상가들에 속한다.<주9>

손니노와 프란체티의 관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탈리아 남부에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중간 계층을 창출하여, 한편으로는 지주들의 잔인하고 자의적인 행위를 제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피폐한 농민들의 반란행동을 잠재울 (그들의 표현을 따르자면) '여론'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손니노와 프란체티는 제1인터내셔널의 바쿠닌주의 사상이 이탈리아 남부에서 성취한 대중성에 겁을 집어먹었다. 그들의 공포는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실수를 저지르게 하기도 했다. 예컨대 그들의 책에서 (우리가 기억하기에) 그들은 칼라브리안 소읍에 있는 한 여인숙 또는 싸구려 식당이 '파업자들'[scioperanti]의 이름을 따서 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국제주의의 사상이 얼마나 널리 퍼져있고 깊숙히 뿌리박혀 있는지에 대한 증거로 인용하고 있다. 이 사실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그리고 저자들의 지적 성실성을 고려한다면 틀림없이 그럴 것인데), 남부에 얼마나 많은 알바니아의 식민지가 있으며 skiperati['알바니아인들']라는 단어가 다양한 방언들 속에서 어떻게 이상하고 가장 의심스러운 변형을 거쳤는지를(베네치아 공화국의 문서에서도 S'ciopeta로 구성된 군사적 조직에 대한 언급이 발견될 정도로) 생각해본다면 훨씬 간단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주10> 결국 이는 바쿠닌의 이론이 남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기 보다는 상황 자체가 그에게 바쿠닌의 이론을 떠오르게 할 정도였던 것이다. 확실히, 남부의 피폐한 농민들은 바쿠닌의 뇌수가 '풍지박산 (pan- destruction)'을 꿈꾸기 훨씬 전에 '모든 것을 때려 부수는' 것을 생각했던 것이다.

손니노와 프란체티의 정부 계획은 결코 실행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사실 그럴 수도 없었다. 국민경제와 국가의 조직에서 남부와 북부 사이의 구조적 관계 때문에, 경제적 의미에서 광범한 중간계급의 출현(또는, 말하자면 광범한 자본주의적 부르조아지의 출현)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이 장소에서의 어떠한 자본 축적도, 어떠한 저축의 축적도, 재정적 관행적 체계에 의해서, 그리고 회사를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들 자신이 그들의 이윤을 지방적으로 새로운 자본으로 이동시킬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서 불가능해진다. 그들은 지방적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와서 이민이 거대한 비율에 달하게 되고 미국으로부터 최초의 송금이 밀려들기 시작하자,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신이 나서 외쳐댔다. "손니노의 꿈이 실현되고 있다. 남부에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일어나고 있는 조용한 혁명은 국가의 전체 사회적 경제적 구조를 변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개입했고, 조용한 혁명은 태어나자마자 숨이 막혀 버렸다. 정부는 고정 이자율로 국채를 발행했고, 이민자들과 그 가족들은 조용한 혁명의 대행자에서 북부의 기생적 공업에 국가보조금을 충당하는 대행자로 바뀌었다. 프란체스코 니티는 형식적으로 남부의 농업 블럭 외부에 서있는 민주주의자로서, 손니노의 계획을 유효하게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것 처럼 보였다. 역으로, 그는 남부의 저축의 마지막 원천을 긁어모으는, 북부 자본주의의 가장 효과적인 대행자였다. 거의 전부가 남부로부터 온 수십억이 할인은행(Banca di sconto)에 의해 삼켜졌다. 이탈리아 할인은행의 40만 예금주들의 다수는 남부의 저축자들이었던 것이다.

농업 블럭 위에는 남부에서 활동하는 지식인 블럭 역시 존재했는데, 이들은 지금까지 실질적으로 농업 블럭의 균열이 위험해지거나 [위험]사태를 일으키는 것을 예방하는데 봉사해왔다. 주스티노 포르투나토와 베네데토 크로체는 이러한 지식인 블럭의 대표자들이며 따라서 이들은 반도 전체에서 가장 활동적인 반동으로 간주될 수 있다.

우리는 남부 이탈리아가 극도의 사회적 분열의 지역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러한 규정은 농민들에게뿐만 아니라 지식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광대한 토지 자산과 더불어, 남부에는 언제나 개인들이나 거대 지식인들의 소그룹들에 막대한 문화와 지력의 축적이 존재해왔던 반면에, 낮은 수준의 문화 조직들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남부는 Laterza 출판사와 La Critica지를 가지고 있다. 남부는 가장 위대한 학식을 가진 학술단위와 문화단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남부에는 소규모 또는 중규모의 평론지도, 남부 지식인의 중간 수준의 그룹들이 구성하는 출판사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농업 블럭으로부터 벗어나서 남부문제에 급진적 방식으로 접근하려 했던 남부인들은 남부 외부에서 출판되는 평론지에서 환영받음을 발견했고 스스로 이들 평론지들 주변에 모여들었다. 심지어는 금세기에 중부와 북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중간층위 지식인들의 모든 문화적 이니셔티브들은 남부주의로 특징지워진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남부 출신의 지식인들에 강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피렌체 지식인 집단의 모든 평론지들(La Voce, L'Unità),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의 평론지들(Cesena의 L'Azione), G. Bonarelli에 의해 출판된 젊은 에밀리아와 밀라노의 자유주의자들의 평론지들(볼로냐의 La Patria 또는 밀라노의 L'Azione), 그리고 끝으로, 고베티의 Rivoluzione liberale.

물론, 이러한 모든 운동들의 최고의 정치적 지적 중재자는 주스티노 포르투나토와 베네데토 크로체였다. 농업 블럭의 협소한 범위보다 훨씬 넓은 경계 내에서, 그들은 남부문제가 접근되는 방식이 절대 일정한 선을 넘지 않도록, 혁명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만들려고 했다. 남부의 전통적 지역에서 성장했으나 유럽과, 따라서 세계문화와 연결됨으로써, 고도의 문화와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로서 그들은 남부의 교육받은 젊은이들의 가장 진지한 대표자들의 지적 요구를 만족시키며, 이들이 현존 조건들에 반항하고자 하는 불안한 충동을 잠재우며 또한 이들을 사고와 행동에 있어 계급적 평정의 가운데길로 정향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소위 네오-프로테스탄트 또는 캘빈주의자들은 이탈리아에서 근대 문명의 조건 탓에 대중적 종교개혁은 불가능하며, 역사적으로 유일하게 가능한 개혁은 베네데토 크로체의 철학과 함께 이미 일어났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고의 방향과 방식이 변화했으며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카톨릭주의 및 신화에 기반한 여타의 모든 형식의 종교를 초월하여 구축되다. 이러한 의미에서 베네데토 크로체는 무한히 중요한 '국민적(national)' 기능을 완수했다. 그는 남부의 급진적 지식인들을 농민 대중으로부터 분기시켜 그들을 국민적이고 유럽적인 문화에 참여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문화를 통해서 그는 이들 지식인들이 민족 부르조아지와 결국 농업블럭에 흡수되도록 보증했던 것이다.

<신질서>와 토리노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언급했던 지적 구성과 연결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그들 역시 주스티노 포르투나토와 베네데토 크로체의 영향을 느꼈다고 하더라도--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들은 그러한 전통과의 완전한 단절과 새로운 발전의 시작을 대표하며, 이는 이미 열매를 맺었고 또한 계속될 것이다. 이미 지적되었듯이, 토리노 공산주의자들은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를 이탈리아 역사의, 그리하여 또한 남부문제의 현대적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좌익 지식인들의 특정 층위 간의 매개자로 기능하면서 그들은 후자의 정서적 시야를--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상당한 정도로 개조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대해 주의깊게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피에트로 고베티 같은 인물의 주요한 특질이다. 고베티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며 결코 그렇게 되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적 정치적 위치를 이해했으며 그의 사고는 이러한 요소를 배제하고는 더 이상 진척될 수 없었다. 신문에서 함께 작업하면서, 우리는 고베티로 하여금 이전에는 그가 단지 책 속의 공식으로만 알고 있던 생생한 세계와 접촉하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적 정직성과 함께, 어떠한 소아적 허영이나 협소함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던 탓에, 그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하여 이해하고 사고하던 전통적 방식 전체 체계가 오류이며 부당하다고 스스로 결론짓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롤레타리아의 세계와의 이러한 접촉이 고베티에게 갖는 중요성은 무엇이었던가? 그것들은 우리가 여기서 언급하고 싶지 않은 새로운 개념을 위한 원천이자 자극이었다. 즉, 그것은 많은 부분 생디칼리즘과 지식인 생디칼리스트들의 사고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개념이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자유주의의 원칙들은 개인적 현상의 질서로부터 대중 현상의 질서로 투사된다. 개인들 생활에서의 최고의 질과 위신은, 흡사 집합적 개인들과 다름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계급들로 옮겨진다. 이러한 시각은 이를 공유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대체로 순전한 불평이나 장점 및 단점의 보증(registration)으로, 경쟁의 심판이나 상벌의 수여자로서의 밉살스럽고 어리석은 입장으로 귀결된다. 실천적으로, 고베티는 이러한 운명을 피했다. 그는 스스로가 매우 재능있는 문화적 조직가임을 보여주었고 최근 시기에 노동자들에 의해 무시되거나 경시될 수 없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919-21년에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조아지보다 더 우월한 지배계급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정직하고 진지한 지식인 그룹들이 후퇴할 수 없도록 참호를 구축했다. 어떤 사람들은 선의와 정직함에서, 또 어떤 이들은 악의와 부정직에서, 고베티는 위장한 공산주의자에 불과하다고, 공산당의 앞잡이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신질서>의 공산주의자 그룹의 앞잡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런 바보같은 소문은 부인할 필요조차 없다. 고베티라는 인물과 그가 대표한 운동은 이탈리아의 새로운 역사적 환경의 자생적 산물이었다. 그것이 이들의 상징성과 중요성이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 당의 동지들로부터 Rivoluzione liberale의 사상적 조류에 맞서 투쟁하지 않는다고 비난받곤 했다. 사실 이러한 투쟁의 부재는 유기적 연계의, 우리와 고베티 간의 (사람들이 말하길) 마키아벨리적 성격의 유착의 증거로 간주되었다. 우리가 고베티와 싸울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적어도 그 주요 원칙에 관한한, 우리가 대항해서 투쟁할 수 없는 운동을 발전시키고 대변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지식인과, 그들이 계급투쟁에서 수행하는 기능의 문제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베티는 실천적으로 (1) 자본주의 기술의 영역에서 성장하여 좌파의 입장을 채택하고, 1919-20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옹호했던 지식인들과의, (2) 남부문제에 전통적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훨씬 복잡한 관계들을 통해, 접근하여 북부 프롤레타리아트를 동등하게 수용했던 일련의 남부 지식인들(이러한 지식인들 가운데 Guido Dorso는 가장 중요하고 흥미로운 인물이다)과의 연계를 제공했다. 왜 우리가 Rivoluzione liberale 운동에 맞서 투쟁해야 했겠는가? 우리의 강령과 교의를 A부터 Z까지 받아들인 이들이 순수한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그들에게 요구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패러독스이며, 따라서 요구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지식인들은 그들의 본성 자체와 역사적 기능 때문에 느리게, 다른 사회 집단들에 비해 훨씬 느리게 발전한다. 그들은 민중의 문화적 전통 전체를 대변한다. 그들은 민중의 역사 전체를 표현하고 종합하고자 한다. 이는 특히 농민의 땅에서 태어난 옛날 유형의 지식인에게 해당한다. 그러한 지식인들이, 덩어리로서(en masse), 과거와 완전히 절연하고 자신들을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영역으로 온전히 이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덩어리로서의 지식인에 관한 한 그것은 불합리하며, 개인으로서도, 상당히 많은 진지한 노력들이 이루어졌고 또 요망된다고 하더라도, 절대 다수의 지식인에 관한한 역시 그것은 불합리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개인뿐만 아니라 지식인 대중(mass)에 관심을 갖는다. 분명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한 명 또는 그 이상의 지식인들이, 개인으로서 그들의 강령과 교의를 지지한다는 것, 프롤레타리아와 융합하여 그들과 하나가 되며 자신들을 이의 통합적 일부로 느끼는 것은 중요하며 또한 유의미한 일이다. 하나의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조직적 요소가 부족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만의 지식인 층위를 갖고 있지 않고 그것도 아주 느리고 힘들게, 국가권력을 장악한 후에 비로소 그러한 층위를 형성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지식인 대중 내에서 절연이, 역사적으로 특징지워지는 유기적 성격의 절연이 발생한다는 것 역시 중요하고도 유용한 일이다. 여기서 하나의 대중적 구성으로서, 현대적 의미에서 좌파적 경향--결국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로 정향되는 경향이 구성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대중들간의 동맹, 특히 프롤레타리아트와 남부의 농민대중간의 동맹을 목도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지식인의 구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남부의 농업블럭을 파괴하는 것은 점점 중요성이 증대하는 피폐한 농민 대중을 자율적이며 독립적인 구성으로, 당의 노력을 통하여, 조직하는데 성공하느냐에 달려있다. 하지만 이러한 불가결한 과업에서 그 성공 정도는, 농업블럭에 유연하지만 아주 견고한 철갑을 제공하는 지식인블럭을 해체시킬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과업의 달성에 있어 프롤레타리아트는 피에트로 고베티의 도움을 받았으며, 우리는 망자(亡者)의 친구들은 그가 수행하던 작업을, 그의 지도 없이도, 계속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오직 두 개의 사회적 세력, 즉 프롤레타리아와 농민만이 본질적으로 국민적이며 미래의 담지자라는 것을 깨달은 북부와 남부의 지식인 부위(또한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이러한 이들이 존재한다)에게 있어 이는 방대하고도 어려운, 그러나 어떠한 희생도(고베티의 경우에서와 같이 심지어는 목숨까지) 감수되어야하는 과업인 것이다. . . . (김현우 옮김)

(1926년 9월에서 11월 사이에 씌여짐)


좀 더 읽기 : {옥중수고} 2편(거름)의 [이탈리아 역사에 대한 수고]는 파편적인 글들의 묶음이지만, 남부문제의 맥락을 참조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람시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주세페 피오리의 {그람시 - 한 혁명가의 생애와 사상}(두레)이 여전히 최적의 입문서이다. 풍부한 해석을 담고 있는 문헌으로 W. L. 아담슨, {헤게모니와 혁명 - 그람시의 정치이론과 문화이론}(학민사)을 추천한다.





1) Piero Gobetti의 La Rivoluzione liberale에 기고하던 Tommaso Fiore의 필명.

2) 역주 - 살베미니는 사회당을 떠날 때 그의 입장을 '구체주의(concretism)'라고 정의했다.

3) 역주 - Enrico Corradini(1865-1931)는 다눈치오와 함께, 전전의 이탈리아 민족주의 운동의 유력한 인물이었다. 그는 미국, 남미, 북아프리카를 방문하면서 이탈리아 이민에 대한 독창적인 연구를 수행했고, 이탈리아인이 싸구려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정복자로서 해외로 나갈 수 있도록 아프리카로의 식민지 확장을 지지했다. 그는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금권정치 사이에서 '프롤레타리아 국가'로서의 이탈리아라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L&W판, 각주 255에서)

4) 역주 - 1914년 6월 7일, Ancona에서 Malatesta와 Nenni에 의해 조직된 반군국주의 시위에서 경찰의 발포로 세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PSI는 총파업을 지시했고, 전국에 걸쳐 봉기가 확산되었다. Ancona는 열흘 동안 봉기자들에 의해 장악되었고 이를 진압하는데는 만명이 동원되었다.(L&W, 각주119)

5) 역주 - 카톨릭과 온건파 자유당 간의 지방의회 의석 확보를 위한 합의(L&W, 각주201)

6)

7) 역주 - 이탈리아어 원문 "nordici e sudici"는 사실 번역이 불가능한 말장난이다. 'nordici'는 '북부인'을 의미하는데 반해, 'sud'는 '남쪽(south)'이지만 'sudici'는 '남부인(southerners)'이 아니라 '더러운(filthy)'의 의미이다.(L&W, 각주 263에서)

8) 역주 - 움베르토 테라치니

9) Sidney Sonnino와 Leopoldo Franchetti는 투스카니 출신의 유력한 보수주의 정치인이다. 1876년에 그들은 남부의 사회경제적, 정치적, 행정적 문제들에 대한 개인적 조사를 수행했으며, 이는 최초로 공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1877년에 그들의 연구결과를 Inchiesta in Sicilia라는 두권짜리 연구서로 출간했다. Sonnino의 책은 I contadini[농민들]이라는 부제를, Franchetti는 Le condizioni politiche e amminstrative della Sicilia[시칠리아의 정치적 행정적 조건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10) 역주 - 그람시 자신의 증조부가 1821년 이후 Epirus로부터 이주한 그리스-알바니아인 이었다. "내 자신은 인종이 없다. 나의 아버지는 가까운 과거의 알바니아 기원을 갖고 있다"(Lettere dal Carcere, Turin, 1965, p.506). 그람시라는 이름 자체가 원래 알바니아의 것이다. 오늘날 알바니아 남동부에는 Gramshi라는 마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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